우주는 얼마나 클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우리은하 뒤로도 무수한 은하들이 늘어서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별안간 우리은하는 우주 속의 한 조약돌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발견 하나로 일약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은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었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그는 얼마 뒤 다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여 온 인류를 경악케 했다. 인류가 오랫동안 써왔던 우주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 셈이었다.
허블의 발견이 있기 천에도 사람들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미리내(은하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미 400여 년 전에 갈릴레오가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하늘을 들여다보고는, 어마어마한 별무리들이 뭉쳐 있는 은하수를 인류에게 알린 바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은하수에 대한 놀라운 추론을 내놓았다. 회전하는 거대한 성운이 수축하면서 원반 모양이 되고, 원반에서 별들이 탄생했으며, 은하수가 길게 한 줄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원반 위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들어보아도 놀랄만한 해석이었다.
칸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은하 바깥으로도 무수한 은하들이 섬처럼 흩어져 있으며, 우리은하는 그 수많은 은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섬우주론을 내놓았다.
이 섬우주론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200년 뒤 미국에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20년, 우주를 사색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우주론 대논쟁을 벌인 것이다.
장소는 워싱턴의 NAS(미국과학 아카데미), 주제는 우주의 크기였다. 그 크기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안드로메다 성운이었는데, 그 ‘성운'이 우리은하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는 곧, 우주 속에서 우리 인류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어느 천문학자가 말했듯이 '천문학은 우주 속에 있는 인류의 위치를 찾아내라'는 소명을 갖고 태어난 학문이기 때문이다.
논쟁은 두 논적을 축으로 하여 불꽃 튀게 진행되었는테, 하버드 대학의 할로 섀플리(1885~1972)와 릭 천문대의 히버 커티스(1872~1942)로, 둘 다 우주론에 대해서는 내로라하는 일급 천문학자였다.
두 사람의 이력서를 잠시 살펴보면, 먼저 섀플리는 1919년 최초로 우리 은하계의 구조와 크기를 밝히고, 태양계가 은하계 속에서 자리하는 위치를 찾아냄으로써 태양계가 은하 중심에 있을 거라는 기존의 생각을 뒤집었다. 그리고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은하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했다. 태양계가 우리은하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섀플리의 우리은하 모형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우주관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인류는 은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 이는 지구 중심설을 몰아낸 코페르니쿠스의 충격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농가 출신인 섀플리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인데, 그가 천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꽤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언론학을 전공하려고 대학에 갔는데, 그 학과 개설이 1년 지연되는 바람에 다른 과를 찾기 위해 안내 책자를 뒤적였다. 처음에 ‘archacology(고고학)'가 나왔지만 그는 이 단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astronomy(천문학)'였는데 그건 읽을 수 있었다. 이게 섀플리가 천문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의 전부다.
그는 나중에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장이 되어 관측을 하지 않는 낮예는 천문대 밖에 나와 앉아 개미를 관찰하는 일에 열중하여 개미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한 괴짜였다.
이러한 섀플리의 반대편에 선 커티스는 허셜-캅테인 모형을 받아들여 칸트의 섬우주론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허슬-캅테인 모형이란 우리은하 구조를 최초로 연구한 허셜의 이론과 캅테인의 이론에서 나온 우리은하 모형이다. 이것에 따르면 우리은하의 모양은 지름 4만 광년의 타원체이며, 태양은 그 중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이 모형을 받아들인 커티스는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50만 광년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섀플리 모형에서 주장하는 우리은하 크기를 홀쩍 넘어서는 거리였다. 즉, 커티스는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은하 안에 있는 성운이 아니라, 우리은하 밖의 외부은하임이 틀림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대논쟁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판정을 내려줄 만한 잣대가 없었던 것이다. 해결의 핵심은 별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문제로, 이는 예나 지금이나 천문학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던 난제였다.

그러나 판정은 엉뚱한 곳에서 내려졌다. 3년 뒤, 혜성처럼 나타난 신출내기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은하 밖에 있는 또 다른 은하임을 밝혀냈던 것이다. 이로써 칸트의 섬우주론은 200년 만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논쟁의 진정한 승자는 칸트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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