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완성되는 태양 중심설
16세기에서 17세기 초 사이의 영국은 과학사적 측면에서 볼 때, 유럽 대륙의 국가들에 비해 격리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영국에서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처음 소개된 사례는 1556년 로버트 레코드(Robert Recorde, 1512-1588)의 저서 『지식의 성(The Castle of Knowledge)』을 통해서였다. 이 책은 학생들을 위한 천문학 기본서였다. 이 책은 어떤 학자와 그의 스승 사이의 대화를 통해 내용을 하나씩 풀어가는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전반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소개하는 내용을 다루었으며,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내용을 조금 언급하고 있다. 주된 내용은 전통적 논쟁거리였던 ‘실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가?’에 대한 것과 ‘지구가 운동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1600년 이후부터 지구의 운동을 부정하는 영국 학자들의 수는 다소 줄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과학적 방법론에 큰 영향을 끼쳤던 그팬시스 베이컨(Prancis Bacon, 1561-1626)은 1623년에 저술한 『학문의 존엄성에 관하여(De Augmentis Scientiarum)』를 통해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비판했다.
윌리엄 길버트(Willilam Gilbert, 1554-1603)의 자기장 이론에 깊은 영감을 받은 바 있는 헨리 겔리브란드(Henry Gellibrand, 15987-1637)는 자기장 이론을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적용시켜 천체의 운동을 해석하려 했다. 그리고 당시 천문학 교수였던 새뮤얼 포스터(Samuel Foster, ?-1652)는 『행성계에 관하여(of the Planetary Instruments)』라는 논평을 통해 코페르니쿠스가 옳음을 주장하며,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1652년까지 강단에서 줄곧 태양중심설을 가르쳤다.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1660년대 이전까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어떤 자료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1663년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 1638-1675)의 저서에서 언급이 시작되긴 하지만, 학문적 접근은 167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17세기 중반까지 스코틀랜드 소재 대학들이 지배하고 있던 학풍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이었으며, 그들은 새로운 천문학에 대해 약간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970년대부터는 새로운 학문 경향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1680년대에 접어들자 대륙에 소재하고 있는 대학들의 과학 연구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자신의 것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뉴턴은 베이컨적 경험론을 수학적인 방법론과 결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베이컨적’이라는 의미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편견과 선입견의 제거를 자연 인식의 가장 중요한 우선 조건으로 삼는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베이컨, 파스칼, 후크, 보일의 경험론 모두가 여전히 신학적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비록 영국이 대륙에 비해 태양중심설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1687년에 이르러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통해 태양중심설을 학문적으로 최종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과학사에 있어 대단한 성과라 평가되고 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프린키피아(Principia)』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의 철학적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제3권 마지막 부분에서 ‘신은 항상 모든 곳에 있으며 실재하고, 인간은 신을 찬양하고 숭배해야 하며, 사물의 모습을 바탕으로 신에 대해 논하는 것이 진정 자연과학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교황에게 바치는 헌정서’에서 표현한 바가 있는 연구 동기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프린키피아』는 ‘근대 천문학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의 완결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제1권의 제2장, 제3장에서 논증되는 만유인력 이론과 3가지 운동 법칙을 근거로 한 케플러 법칙의 증명, 그리고 제1권에서 논증되는 법칙 66과 그 부속 논증들을 통해 달의 운동을 명쾌히 규명한 것은 매우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제3권은 태양계의 구조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행성들과 위성들의 운동, 달, 혜성을 비롯한 여러 태양계 천체의 운동을 구체적으로 수리(數理) 논증함으로써 『프린키피아』를 통해 태양중심설과 관련된 학문적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태양중심설이 코페르니쿠스, 케러, 갈릴레이, 뉴턴을 거치면서 법칙을 수립되기까지 비록 각종 이론이 양산되며 복잡한 상황이 되기도 했지만, 그 기간의 성과는 과학사에 있어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영국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 당국은 태양중심설에 대해 강력한 통제나 법적 제재를 가하지 않았으며, 학계에서도 불미스러운 사건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17세기 말엽까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의 성직자들은 뉴턴의 저작들을 집요하게 비판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국가들의 가장 큰 관심은 가톨릭 세력들의 활동에 관한 것들로 완전히 몰입되고 있었고, 이 두 세력 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면서부터는 프로테스탄트 세력 내에서 계파(系派)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새분화된 프로테스탄트의 계파들은 상호 견제하는 적대 세력으로 발전했는데, 그 시기 루터파, 칼뱅파, 성공회파 등을 비롯한 여러 계파의 관심은 뉴턴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규합에 집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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