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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 이야기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 동기는 무엇인가?

by hangilkor-info 2025. 1. 31.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 동기는 무엇인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 동기는 무엇인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표지를 넘기면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서문과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바치는 헌정서다. 당시 출판되던 책들의 대부분은 의례 저자가 서문에 자신의 집필 의도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데 나름 능력을 인정받은 학자가 교황을 위한 헌정서를 따로 추가하기라도 한다면, 저자가 어떤 사상들을 기반으로 해서 연구에 임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책이 교회 당국뿐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교황에게 상세하게 고()하는 내용까지 포함하게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은 코페르니쿠스의 의도에 상응하는 내용들이 완전하게 담기질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일찍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야기할 충격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가 될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길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태양중심설을 주장한 행성이론을 책으로 출판하게 될 경우, 교회와 천문학계로부터 비웃음을 살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출판을 미뤄 왔음을 서문에서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주변인들의 설득으로 극복할 수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코페르니쿠스의 입장은 서문 다음에 이어지는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바치는 헌정서에서 자세하게 언급된다. 그는 현정서에서 과거 락탄티우스(Lactantius, AD. 250-325)가 지구는 구형이다'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을 향해 비웃으며 억지를 부렸던 일화를 거론하며 설사 그런 유()의 작자들이 다시 나타나 현재 자신의 이론을 폄훼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위들에 대해 자신은 조금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오지안더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서문에서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단지 가설일 뿐이고, 이 가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천문학을 입문할 때보다도 더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락할 것이며, 천문학은 원래 확실한 사실을 알려 주는 학문이 아니다'라고 뚜렷하게 적시했다. 오지안더는 자신이 조작한 서문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독자들은 그 서문의 내용이 코페르니쿠스 본인의 의도라고 오해하고 말았다.

 

  오지안더가 서문을 자의적으로 조작한 이유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과 주장들이 절대 용인할 수 없는 거짓된 내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천문학을 여전히 기독교적(지구중심적) 세계관 속에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오지안더는 서문에서 이 가설들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코페르니쿠스를 학자로서는 높게 평가했다.

 

  오지안더의 이런 배신행위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의 최측근이었던 레티쿠스와 기세는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페트라이우스에게 수정본을 다시 제작하라고 압력을 가하며 소송까지 몰고 갔지만 끝내 패소하고 말있다. 결국 그들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조작된 서문에 이끌린 채 배포되는 것을 바리볼 수밖에 없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3월에 서점과 독자들에게 소개될 준비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154212월에 코페르니쿠스에게 뇌졸중이 찾아오는 바람에 오른쪽 몸이 마비되어, 그는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코페르니쿠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그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부분적 인쇄 결과물들을 한 묶음씩 받아보면서 최종적인 검토 작업을 거쳐 교정한 후, 그 바뀐 내용을 다시 원고로 작성해 인쇄소로 보낼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진 코페르니쿠스는 더 이상 그런 작업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이듬해 5월에 자신이 평생을 쏟아부었던 노력의 결과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오지안더의 서문 조작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한동안 교회 당국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위험 요소로 간주되지 않은 채 새로운 패러다임의 배아(胚芽)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나기 10여 년 전쯤,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주변으로부터 행정적, 정치적, 법적 그리고 의학적 전문성 등을 높게 평가받고 있었던 터라 교회 당국은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매일 천문학에만 몰두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그의 연구는 항상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533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우연히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는 자신에게 코페르니쿠스 행성계를 자세히 설명해 준 요한 알브레히트 비트만슈타트(Johann Albrecht Widmanstad)에게 훌륭한 정보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당시에 매우 귀한 자료로 여겨지던 그리스 고전의 원고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그 후 1536년경에 새롭게 제안된 행성 이론에 관한 소문을 듣고서 그 자세한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자 코페르니쿠스를 방문했던 니콜라우스 쇤베르크 (Nicolaus Schoenberg) 추기경은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새로운 행성 이론을 가능한 빨리 구체화시켜 빨리 책으로 출판하기를 당부했다. 쇤베르크는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교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 것에 의심하지 않았다.

 

  주변의 관심과 격려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기득권을 행사해 오던 세력들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우려가 코페르니쿠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그는 교황을 위한 헌정서에서 자신의 파격적인 주장에 대한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고 겸손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통해 태양중심설을 견지하는 자신의 태도가 자칫 교회 당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비쳐지지는 않기를 바랐다.

 

  코페르니쿠스는 가능한 불필요한 논쟁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비롯해 여러 정치·사회적 세력들이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들 중 하나가 되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헌정서를 통해 자신의 연구는 오랜 검토를 거쳤으며, 고대 현자(賢者)들의 견해를 충분히 참고했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이론은 허황한 기초 위에서 수립된 것이 아님을 알리고자 했다. 그는 로마의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Mareus Tullius Cicero, BC. 106-43)의 작품에서 히케타스(Hicetas, BC. 400-335)는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었다는 내용이 있음을 언급한 후, 플루타르크(Plutarch, AD. 46-127)의 작품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한 바가 있음을 덧붙여 소개했다. 그리고 선대의 학자들처럼 자신 역시 어떤 가설이든 자유로이 구상할 수 있음을 교황의 묵시적 양해라는 형식을 통해 허락받기를 원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헌정서를 통해 교회의 연중 제례(祭禮)행사 때마다 골치를 썩이고 있던 달력 문제와 관련해 현재 수학자들이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대해 아직도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할뿐더러, '1년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도 제대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자신의 책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그런 문제들의 해결에 분명히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임을 교황에게 확실하게 설득함으로써 자신의 연구 가치를 확인 받으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노력 들은 분명히 신에게 이를 수 있는 참된 길을 확실하게 열어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에 조예가 없던 교황에게 당시 천문학계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그는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이 당시까지 이룩한 연구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은 고작 서로 맞지도 않는 손, , 머리, 팔다리를 억지로 끌어모아 조합해 놓은 듯한 우스꽝스러운 '괴물 모습의 우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판하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증명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놓친다든지 아니면 전혀 상관도 없는 것들을 끌어들여 증명 과정에 끼어 넣는다든지 하는 과오를 지속해서 범해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그는 당시 천문학계가 직면한 여러 부조리들의 척결은 오직 지구의 원운동과 각 행성들의 운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겉보기 운동'과 관련된 해석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같은 비판을 통해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논쟁으로부터 벗어난 이후의 천문학, 즉 어느 청도 수학적 체계가 잡힌 천문학이라는 것조차도 여전히 미흡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헌정서에서 교황은 여타 독자들까지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교황에게 바치는 헌정서라는 형식을 빌려 굳이 교회 당국과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의 가설이 '용인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되었음을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확인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저변에 깔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첨꾼들의 모략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격언을 소개하며 교황의 권위로 그런 자들(중상 모략가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분명히 하는데, 앞서 언급한 바가 있는 '락탄티우스의 어리석은 행동'이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락탄티우스의 어리석은 행동'이란 수학자가 아닌 사람이 수학이나 과학적 가설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 논쟁거리로 발전시킨 사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헌정서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런 뉘앙스의 문장들은 코페르니쿠스가 가톨릭교회 당국과 학계로부터 제기될 수도 있는 불필요한 논쟁에 굳이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가설이 자연스럽게 안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제 1600년에 이르기까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교회 당국과 학계로부터 심한 비난이나 제재를 당하지 않고 잘 비껴갈 수 있었던 것은 헌정서에 진술된 코페르니쿠스의 해명으로 인해 그의 책이 반()신앙적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당국의 '암묵적 용인'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점, 오지안더가 서문을 조작함으로 인해 책의 내용이 덜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점, 그리고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같은 고난도 수리 천문학 서적을 이해할 수 있는 신학자가 당시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 등이 크게 한몫 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헌정서의 마지막 부분은 과거 교황 레오 10(Pope Leo X)의 치세 기간에 열렸던 라테란공의회(Lateran Council: '교회 개혁'을 주요 의제로 다뤘던 제5차 라테란공의회를 말한다. 1512~1517년 동안 전체 12회기로 진행되었다)에서 교회력을 개정하려 했지만, 1년과 한 달의 크기, 그리고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대한 측정값이 너무나 부정확하다는 이유로 그런 시도가 무산된 바가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당시 그 회의에 참석했던 포솜브로네(Fossombrone)의 주교 바오로(Paul)로부터 자신이 받았던 격려는 곧장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 동기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 책은 그 당시 공의회 때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보다 정확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임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이런 노력에 대한 평가는 다른 수학자들과 교황에게 맡긴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헌정서에 포함된 그의 이러한 진술들은 수학과 천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는 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종의 경고라고 할 수 있는데, 또 다른 의미에서 간절한 호소의 내용도 담고 있던 이 헌정서는 가톨릭교회 당국에 포진해 있던 코페르니쿠스 측근들의 동조에 힘입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여러 비판 세력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의 기능도 담당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이처럼 교회 일부 세력들의 기대, 오지안더가 조작한 서문, 난해한 수학적 논증들로 이루어진 구성,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뚜렷한 집필 동기 및 의도의 표명 등이 다 함께 잘 어우러짐으로써 큰 불상사 없이 출판되어 유포될 수 있었다.